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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영화의 '러쉬'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극장개봉작 중에 볼만한 영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통탄해하며 그동안 미뤄두고 못보았던 고전들을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일의 발단. 처음에는 가벼운 소일거리/문화생활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별생각없이 한 편 두 편 보던 것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의 무지함에 부끄러워지고 보다 심층적인 감상에 미련이 생기고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어 급기야는 4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이라는 무지막지한 영화백과를 덥썩 질러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근 일주일간 '에드우드', '파이트클럽', '핑크 플라밍고', '북회귀선', '네버랜드를 찾아서', '월레스와 그로밋',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비롯, '저수지의 개들'까지 재감상해주는 괴력을 발휘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오늘, 본가와 외갓댁에 볼 일이 있어 추운 날에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던 것이 피곤했는지 잠깐씩 졸아가며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다 보고 난 뒤 '이제 또 어떤 영화를 볼까' 행복한 고민 끝에 골라든 행운의 그 영화, '선셋 대로'를 보고야 말게 된 것이다. 그간의 영화 러쉬속에서, '이 영화만큼은 꼭 리뷰해야겠다'하고 맘먹었던 것은 서너편 정도 된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_!! 이라고 외치지만 결국엔 잊어버리거나 귀찮아져서 '나 이 영화 봤다'하며 도장찍고 넘어갈 수준의 성의없는 리뷰를 쓰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그런 막무가내 귀차니즘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반드시 리뷰를 써야할 것만 같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난 바로 지금,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과 감동을 그대로 간직한채로 조금은 '성의있는' 리뷰에 도전해본다. 오늘의 영화, '선셋 대로(Sunset Blvd., 1950)'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완벽한 영화다. 빌리 와일더는 분명 천재일 것이다. 영화는 온갖 감각적인 대사들로 넘쳐나고, 카메라의 앵글이나 구도며 화면구성_ 미장센도 눈물날 만큼 잘되어 있다. 무엇보다 영화 자체가 매우 연극적인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으니 그 극적 효과는 더할 수 밖에 없겠다. 여주인공 글로리아 스완슨의 연기는 보는내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아니, 자기 이야기인데 무슨 연기를 저리 잘한담] 흔히들 '빌리 와일더표'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는지 이 영화를 블랙 코메디로 분류하는데,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비극적인 톤이 짙게 깔려있다.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속에서 시니컬하게 꽂히는 유머들. 영화는 가슴을 울리는 멜로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를 오가며 장르의 파괴마저 꾀한다. 이는 작가/감독의 인위적인 연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극의 자연스런 흐름이기에 더욱 놀랍고 흥미롭다. 싸이코 멜로 드라마와 블랙 코메디, 클래식 스릴러_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도 좋을 만큼 이 영화는 다양한 범주에서 논할 수 있고, 어느 범주에서 논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튼튼하게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여주인공 노마는 무성영화 시대에 한창 '끝발'날리던 청춘스타였고 은막의 여배우였다. 그러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할리우드가 진화하는 동안 그녀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버린 '한물간' 퇴물배우의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녀는 그런 사실을 생각지도 못하고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자신을 여왕 모시듯 받들어주는 집사 맥스와 고성같은 대저택에서 과거의 영광을 매일같이 되새김질하며 살고 있던 그녀에게 각본을 쓰는 작가 조가 찾아온다. 조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열정과 의지로 헐리우드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지금은 자동차값 300불이 없어서 곧 차를 차압당해야 할 처지에 있는 배고픈 시나리오 작가이다. 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연히 도망온 곳이 마침 노마의 대저택이었던 것.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의 [아니, 맥스까지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 노마의 대저택은 말그대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단 두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집. 그 집안을 채우는 것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대화소리도, 고양이나 새의 울음소리도 아니다. 창문틈새로 바람이 불때마다 울리는 음산한 파이프오르간 소리. 사람이 없는 대신 저택은 온갖 호사스런 가구들과 잘나가던 시절의 노마의 사진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가구나 장식품도 적당한 위치에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어야 자연스러운 법인데, 흑백영상위에 그려진 노마의 집은 그 넓은 집을 비싼 가구로 '채웠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구를 빽빽하게 들여놓아 도리어 부자연스런 느낌을 준다. 흑백 화면인데도 그 가구들의 모습은 얼마나 과장되게 뒤틀리고 꼬였는지,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되고 채색되었을지 충분히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정도이다. 미술로 말하자면 아르누보의 극단이랄까. 로코코의 재림이랄까. 소품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과도함이 노마의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 노마는 20년만에 다시 '복귀'할 결심을 하고 - 조가 노마에게 '컴백'이라고 말하자, 노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은 '컴백'이란 단어보다 '복귀'라는 단어가 더 맘에 든다고 말한다 - 자신이 공들여 쓴 살로메 각본을[물론 자신이 살로메 역이다] 조에게 편집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각본은 말도 안되는 쓰레기 글이었지만, 마침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조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제까지와의 생활과는 다른 상류층의 생활을 경험하며 노마의 '애인'이 된다. 물론 처음에는 조도 노마의 막 대하는 태도랄지, 일방적인 의사표시에 불만을 표하고 반항하기도 했다. 그에게 노마의 대저택은 정말 감옥이며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난 저 스틸컷을 보고 정말 섬뜩했더랬다. 아니, 사람이 사는 집이 저렇게 무시무시해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노마가 베푸는 사치스런 선물이나 부담스런 애정표현은 조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것이어서, 불편하고 껄끄럽지만 잘만 참으면 여유있게 살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유혹에 결국에는 넘어가 버리고 만다. 각본을 수정하는 2주간의 기간동안만 머물겠다는 초기의 결심도 어느샌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되어 노마의 화려한 복귀 무대를 기다리게 된다. ![]() 이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보다가 스톱시켜놓고 다시 되감아 보았을 정도였다. 흑백영화의 묘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산책을 나가는 대신 노마의 전성기 때의 무성영화를 같이 관람하는 두 사람. 머리 위에서 환한 불을 뿜으며 덜컥덜컥 돌아가는 영사기. 뿜어져 나온 빛과 만나 뿌옇게 구름을 만드는 진한 담배연기. 화면이 진정 아름답다. ![]() 자신의 각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드밀 감독을 찾아간 노마. 촬영장에서의 장면이다. 노마를 알아본 조명기사가 2층에서 그녀에게 단독 스포트라이트를 쏘아준다. 이 장면 이후로 줄줄이 엑스트라들이 노마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화면 중심에서 온몸으로 쏟아지는 빛을 받고 있는 그녀는 진정 '여왕'이자 '여배우'의 모습이다. ![]()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면 글로리아 스완슨의 찰리 채플린 연기가 아닐까 싶다. 흘러간 영광을 맛보듯, 찰리 채플린의 마임을 코믹하면서 서글프게 연기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진정한 연기자의 모습을 보았다. 드밀 감독의 말처럼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못돼먹은 언론이라고,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나도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노마는 조와 밤마다 함께 각본 작업을 하는 베티에게 질투를 느끼고, 조는 자신의 친구의 약혼녀인 베티와 사랑에 빠지지만 베티를 친구에게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안락한 현실의 품에 안기고자 한다. [이 점이 시시껄렁한 다른 로맨스물과 확연하게 차이를 짓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진은 베티를 보내고 난 후 뒤돌아서는 조의 모습. 2층에서 그런 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노마의 모습이 섬칫하다. 서늘한 눈빛, 꼿꼿하게 세운 턱. 저건 사랑을 넘어 집착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_ 노마는 평생을 최고의 여배우이자 여왕으로 살아왔다. 갖고 싶은 것, 욕심나는 것은 다 가지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단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조이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려는 그 남자. 때로는 아이처럼 울며 매달려도 보고, 자살소동을 일으키며 협박도 해보지만 결국 두 사람의 허울뿐이었던 사랑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간다. ![]() 이 영화에서 글로리아 스완슨의 연기란 감히 그 어떤 여주인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 에서 제인 역을 맡았던 베티 데이비스라면 또 모를까. 두 사람의 연기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연기에 그대로 녹여 냈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고, 가까워 보인다. 저 신들린 듯한 싸이코 연기는 너무도 강렬해서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옛날 영화이고 흑백필름이며 과격한 액션이나 스피디한 전개가 없음에도 흡입력이 엄청나다는 것인데, 그 힘의 절반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정말 무시무시한 연기였다. ![]() 사실 이 영화의 장점은 너무 많아 일일이 말하기가 입이 아플 정도이다. 이런 식의 카메라 앵글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에 하나였다. 맥스가 치던 파이프 오르간 곡도 매우 좋았다. 장엄하면서 으시시한 느낌을 동시에 주어서 마치 드라큘라라도 튀어나올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나 빌리 와일더 영화의 힘이라면 아무래도 시니컬한 어조의 유쾌한 대사에 있지 않을까. "시나리오가 얼마나 형편없을 수 있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번에는 그 극한이 될 것 같다.", "정말 소중한 원숭이였던 모양이다. 킹콩의 증손자쯤 되는 모양이지.", "그도 좀 맛이 간 것 같았다. 아니면 뇌졸중이던지." 이런 대사들은 지금 들어도 킥킥대고 웃을 수 있을 만큼 위트있고 감각적이다. 나도 혼자 보면서 몇 번을 키득대고 웃어버렸다는. ![]() 초반부가 블랙 코미디로 일관한다면, 후반부는 - 특히 결말에 가까워져서는 말할 수 없는 비극, 그 자체이다. 조를 쏘아버리고 정신을 놓은 노마와 노마를 추궁하는 경찰들의 모습. 이 부분은 너무나도 연극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인상깊게 남았던 것 같다. 노마를 뱅 둘러싼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어라고 떠들며 노마의 죄를 캐묻지만, 정작 노마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고친다. 그런 노마에게 스치듯이 '카메라'라는 단어가 들려오고, 카메라란 말에 노마는 반응을 보이며 '심문'이 아닌 '촬영'을 하기 위해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서 1층으로 내려간다. ![]()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계단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배경처럼 굳어버린 가운데 우아하고 아름답게 계단을 내려오는 히로인 노마. 그 동작이 너무나 과장된 모습이어서 도리어 우스워보이고 실소를 머금게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눈물이 나는 것은 또 왜일까. 스타는 늙지 않아. 그래서 스타인걸_ 이라며 중얼거리는 노마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녀를 동정하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이후에 수많은 영화와 CF에서 패러디하게 되는 문제의 이 장면은 나에게는 너무도 극적인 느낌이었다. 이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클로즈업. 포커스가 흐려지며 일그러져가는 노마의 얼굴. 세상은 당신을 잊고 비웃더라도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이의 가슴속에서는 당신은 변함없는 우리의 히로인입니다.
덧. 역시 글로 느낀바를 다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덧2. 같은 해에 개봉한 '이브의 모든 것' 역시도 브로드웨이의 이면을 다룬 수작이라고 들었다. '선셋 대로'가 골든 글러브에서 승리했다면, '이브의 모든 것'은 아카데미에서 승리했다고 하는데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좋은 감상이 될 것 같다. 게다가 '이브의 모든 것'의 여주인공이 베티 데이비스라니 더더욱 마음이 동하고 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영상을 구할 수 있는 곳을 못찾고 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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