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살다 이렇게 끔찍한 영화는 처음 본다. 내가 이제까지 본 그 어떤 영화들보다 처절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영화였다. 이전까지의 영화들이 알콜중독자 - 혹은 술주정뱅이 - 의 삶을 희화하며 웃음거리 정도로만 치부했다면, 빌리 와일더는 이 영화를 통해 단 한 번도 주인공이지 못했던 소외된 그들의 삶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감춰졌던 깊은 곳까지 철저하게 파헤친다. 촉망받던 작가지망생이 성공의 벽에 부딪히며 어떻게 술에 빠지고 중독되어 가는지, 왜 술을 끊지 못하고 점점 더 알콜중독이라는 깊은 수렁속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고단하고 끔찍한 하루하루를 낱낱이 무서울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등 4개 부문을 수상. 빌리 와일더는 이로써 감독뿐만이 아니라 각본가로서의 재능 역시 갖고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입증했다. 빌리 와일더 스타일의 완성, 혹은 시작. '이중배상'에서 보여줬던 긴장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 히치콕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피말리는 심리전, 이에 더해 믿을 수 없을 만큼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 레이 밀란드의 열연. 이후에 만들어진 모든 '~홀릭' 류의 영화는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나자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톡톡 쏘는 대사와 위트넘치는 시니컬한 유머, 그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도 블랙 코메디의 느낌이 물씬 베어나오는 빌리 와일더의 영화들. '잃어버린 주말'을 분기점으로 이 이후에 만들어진 그의 중반기 영화들은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다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셋 대로', '제17 포로수용소', '정부',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까지. 50년대 십여 년간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이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빌리 와일더만의 영화가 되었다. 첫 5분을 보면 그의 영화라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영화를 보는 동안 갑자기 술생각이 뚝 끊길 만큼 알콜중독의 무서움에 대해 온몸으로 깨달았다. 한동안 술은 안마실 것 같았는데 영화본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 40-50년대 영화가 다 그렇듯이 약간은 억지스러운 듯한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비단 알콜중독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홀릭'이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게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시고,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술을 마시게 된다는 그 말. 내 안의 또 다른 나, 숨어있던 '탐욕'이 스스로를 지배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는 것. 어쩐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번 건넌 강은 다시 되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결말 뒤에 그 이후로 다시 주인공 '돈'이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 감독은 의도적으로 대답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헬렌의 말이 복선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14년 뒤에 그의 말처럼, 이만큼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황금같은 주말은 잃었지만 내 앞에는 또다른 일주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는 이래서 빌리 와일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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