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드디어 봤다. 스타일의 완성. 이 이상의 마스터피스는 없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다.



 '파고'의 영광을 다시 한 번. 90년대가 배출해낸 최고의 스타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조차도 '펄프 픽션'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 어려운 일을 코엔 형제가 해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만큼 완벽한 영화다. 이제서야 말하건대 아마도 작년에 볼 수 있었다면, 조심스레 '데쓰 프루프'가 차지했던 맨 윗자리를 뺏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스타 감독'에서 '거장'이 되었다.



 '파고'를 본 사람들이라면,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매우 감명깊게 본 사람들이라면,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적막만이 가득한 새하얀 눈밭에서 황토빛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사막으로 장소만 옮겨졌을 뿐, 두 영화는 매우 비슷한 호흡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이 분들은 정확하게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얼마만큼 채우고 얼마만큼 비워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쓸데없이 긴 호흡을 싹뚝 잘라내거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에 시끄러운 BGM을 까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그런건 초보들이나 저지르는 어설픈 겉멋부리기에 지나지 않음을. 기본기에 충실한 덕택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의 텐션을 유지하며 보는 이를 가슴졸이게 만든다. 단 한시라도 한 눈 팔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그건 영화를 틀어놓고 딴짓을 하고 있는 당신의 잘못이다. 감히 말하건대 절대로 지루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전기의자의 스위치를 올리기 직전의 그 순간, 수줍은 입맞춤을 하기 직전의 그 순간, 심장이 터질 듯한 그 느낌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언제나 그렇듯이 코엔 형제의 영화는 지독하게 허무하고 지독하게 잔인하고 지독하게 공포스럽다. 편안하게 수다를 떨거나 전화를 하는 순간에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려는 그 찰나에 맞닥뜨리는 어둠의 기운. '우연히 마약거래대금으로 추정되는 돈가방을 발견한 한 남자의 도피행각 - 그 남자를 쫒는 사악한 악당의 살인일기'라는 식상할대로 식상한 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미칠 듯한 긴장감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분명 감독의 재주다. 타란티노가 총을 적재적소에 시원하게 사용하는데에 능통하다면, 이 분들은 어디에서 '빵'하고 터뜨려주어야 할지 귀신처럼 알고 있다. '설마....'하며 방심하는 순간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게 숨통을 조여버리는 살인의 기술은 보는 이를 몸서리치게 한다. 악당 역할로 나오는 '안톤 쉬거'는 누군가가 말했듯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박사를 능가하는 최고의 살인마다. 그저 차가운 눈빛 한 방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그는 얼마나 잔인한 악당인가?' '무엇에 비교해서요, 흑사병?' 대사가 촌철살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캡처 사진을 수십 장 올리고 싶은데, 아직 국내에서 개봉도 안한 작품이라 마지막 남아 있는 양심에 전기가 흘러서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다. 덕분에 설명하기 난해한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독특한 앵글이라든지, 더없이 감각적인 영상을 보여줄 수가 없어 영화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굳이 설명하자면 딱 '허무함'의 절정이랄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데이빗 핀처 식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허무주의 스릴러. 이제 이 분들은 이 분야의 선구자인 동시에 완전한 장인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기존의 스릴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성적인 논리회로를 따라가서는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 굳이 제목이 영화 내용과 무슨 관련인지, 영화의 마지막 결말에서 말한 두 개의 꿈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 것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서는 코엔 형제의 영화와 친해지기 어렵다. 당신이 먼저 사용해야 할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화려한 영상 속에 쥐꼬리만하게 주어지는 단서를 짜맞춰, 주인공의 생각하고 이끄는데로 사건을 짜잔하고 해결하는 탐정 놀음이 아니란 것이다. 안톤 쉬거가 사용하는 '신무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기존의 스릴러와는 완전히 다른 장르의 영화다. 코엔 형제는 20세기가 낳은 최후의 포스트모던 작가주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얼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화려한 영상도 없고, 도대체 이 영화를 무슨 맛에 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아마도 숨이 끊길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종착점을 어떻게든 엿보고 싶어서. 혹은 처음부터 답이 없는 메세지를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하는 꼴사나운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좋지 않은가. 원초적인 감정을 쿡쿡 찔러대며 우리에게 웃음이나 눈물, 흥분을 반강제로 요구하는 뻔뻔한 영화들을 보는 것보다야. 무엇보다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내 안의 깊은 무언가를 건드리는 섬세한 감독의 손길.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친절하게도 감독은 엘리스의 입을 빌어 '그것'이 무엇인지 단순명료하게 정의내려주고 있다. '그게 바로 허무야.' 영화의 여운이 길고도 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by Beatrix | 2008/01/26 07:50 | Movie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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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uv Pill at 2008/02/25 14:20

제목 :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by Beatrix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정확히 12시부터 봤다. 틀자마자 여우주연상 시상을 하고 있더라. 하비에르 바르뎀이 남우조연상을 탔다는 기사를 보고 앞부분을 놓친 걸 약간 후회했다. 그 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아, 감동적이더라. 기적의 영화 '원스'가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글렌 한사드는 울고[;;;] 사람들은 큰 박수로 아름다운 ......more

Commented by dcdc at 2008/01/26 10:53
으오, 기대하겠습니다 ㅠ_ㅠ 파고의 그 무덤덤한 잔인함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인가요 ㅠ_ㅠ_ㅠ
Commented by 총천연색 at 2008/01/26 11:09
극찬에는 이유가 있겠죠?
좋은 영화라는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어떻게 보신 건가요? 호홍. 'ㅁ'

흠, 2월 개봉하는 군요.
영화관에서 꼭 봐야지.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1/26 19:08
dcdc 님 : 최고에요! 진짜 말이 필요없는 최고 ㅠㅠㅠㅠㅠㅠ

총천연색 님 : 저는 어둠의 경로로....[..] 코엔 형제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께는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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