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하도 평들이 좋길래 궁금해서 한 번 봐봤다. 2006년 가을, '타짜'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와 담을 쌓았던 내가 무려 15개월의 공백을 깨고 올 들어 처음 본 한국영화였다. 그래서 그 소감은? 소문대로 멋졌다. 기대만큼 굉장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이 한 편의 영화로 가망이 없던 한국영화에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어서 기뻤다. 당신은 무엇을 추격하고 있는가. 나홍진 감독의 첫 장편상업영화 '추격자'다.


 
 영화의 배경이나 캐릭터 설정은 다른 리뷰글에서 하도 많이 나왔길래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말하겠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부녀자연속살인사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만든 '범죄 스릴러'의 탈을 뒤집어 쓴 한 편의 '휴먼 드라마'요, '인간만들기 프로젝트'다. 주인공 엄중호는 어떤 경찰의 말처럼 살인자보다 더 나쁜 보도방 포주다. 연쇄살인범 지영민이 '절대악'이라면, 엄중호는 '악'이지 '선'은 아니다. 그런 엄중호가 '절대악'을 추격한다. 왜? 처음에는 자신의 '돈줄'인 아가씨들을 줄줄이 팔아치운 '4885'를 잡기 위해서였다. 모텔 씬에서도 드러나듯이 엄중호에게 김미진을 비롯한 아가씨들은 그냥 '돈'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다. 처음에 엄중호는 지영민의 자백에도 그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냥 아가씨들을 '팔아치웠다'고만 생각한다. 뭐 눈에는 뭐 밖에 안보인다고. 그랬던 엄중호가 달라진다. 김미진의 딸, 은지를 만나고서부터.


 
 정말 촌스럽고 낡디낡은 통속극이 아닐 수 없다. 비열한 보도방 포주가 죽어버린 그녀의 남겨진 딸을 보고 마음이 짠해져서 범인을 찾아 헤맨다는 뻔한 스토리. 그런데 그 이야기가 놀랍게도 잘 먹힌다. 왜? 감독의 연출력 때문에. 몇몇 클리셰는 상당히 고전적인 것이어서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또한 몇몇 몽타주 기법은 세련되고 로맨틱하게 잘 뽑아져 있더라. 특히 엄마의 죽음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차 유리에 흐르는 빗물로 표현한 장면은 굉장했었다. 진부할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소리를 죽이고 우는 표정을 클로즈업하니 느낌이 다르더라. 또 방문을 닫는 동시에 철제함 서랍을 여는 식으로 동떨어진 두 장소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컷들은 얼마전에 보았던 코엔 형제의 '밀러스 크로싱'을 떠올리게 했었다. 감독이 이것저것 많이 갖다 썼더라. 그런데 참 잘 갖다 썼더라. 그 점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 전까지 한 대도 안피우던 담배를 경찰서 나오면서 피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직감했더랬다. 역시나 담배가 똑 떨어지고 하필이면 그 가게를 들리고, 거기서 아주머니는 안해도 될 말들을 하더라. 이처럼 억지스러운 설정이 몇 군데 보이긴 했지만 이를 비롯한 모든 설정은 어차피 엄중호의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한 장치들이니 딱히 불평할 만한 것은 못된다. 시체들을 비추는 장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들은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풀어낸 것 같던데, 핏방울이 공중으로 튀는 장면을 방울 하나하나 세심하게 잡은 것 등은 노력이 많이 엿보이더라. 신인 감독의 열정이 느껴지는 부분이어서 좋았다. 수족관 속에 '그 얼굴'은 좀 오버센스같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적절한 유머와 적당한 호흡을 가지고 능숙하게 잘 뽑아냈다. 정말이지 첫 데뷔작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앞으로 더 기대해 볼 일이다.


 
 아, 그리고 감독이 서울시장과 경찰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던데 지나치게 희화화된 감이 있어 나는 조금 불편했더랬다. 나라고 그 사람들을 좋아라 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집중했더라면 영화가 한결 고급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뭐 상관없나. 애초에 보도방이니 포주니 연쇄살인이니 하는 단어들은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으니까. 다른건 다 괜찮았는데, 마지막에 서울시장이 '기자들 다 어디갔어?'라며 다그치는 장면에서 지저분한 모습의 엄중호를 보고 기겁하며 달아나는 건 좀 그랬다. 관객들을 웃겨야 한다는 부담감은 안가지셨어도 됐는데.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너무 속이 훤이 보이더라. 이제 엄중호는 '악'에서 '선'이 됐으니 앞으로 은지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겠지? 난 마음이 삐뚤어진 인간이어서 이런 훈훈한 결말은 딱 질색이다. 차라리 지영민이 잡히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 하지만 누가 뭐래도 굉장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영화라는 점, 감독의 첫 장편데뷔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제껴놓고라도 영화표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흥행할지 꽤 관심있게 지켜볼테고, 며칠 후 개봉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의 경쟁구도도 은근히 기대중에 있다. 물론 코엔 형제의 완벽한 손놀림과 비견할 것은 아니었지만, 보다 우리 감성에는 더 친근하고 가까울테니. 간만에 좋은 한국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 그리고 이 영화 예매해서 표끊고 들어가는데 무려 신분증 검사를 두 번 받았다onz 대굴욕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예매할 때 검사했으면 됐지 왜 표끊는데에서 또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는 겁니까. 내가 오늘 윗머리를 묶고 상당히 학생다운 복장을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에게 이럴 수가 있는겁니 ㅠㅠㅠ 같이 갔던 친구가 상당히 민망해했다. 심지어 신분증 검사도 형식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고 있더라;;; 사진 속 얼굴과 내 얼굴을 유심히 대조해보더니 그제서야 ㅇㅋ 사인을 내려주어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제길!!! 이제 앞으로 뱅헤어는 안할테다 ㅠㅠㅠ


by Beatrix | 2008/02/18 20:11 | Movie | 트랙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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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dcdc의 잡담창고 at 2008/03/26 01:18

제목 : [추격자] 내가 죽였어.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는 전직 형사 중호. 최근 데리고 있던 여자들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조금 전 나간 미진을 불러낸 손님의 전화 번호와 사라진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가 일치함을 알아낸다. 미진을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영민과 마주친 중호.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영민이 바로 그놈인 것을 직감하고 추격 끝에 그를 붙잡는다. 그러나 영민을 잡아둘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공세우기에 혈안이 된 경찰은 미진의 생사보다는 증거를 ......more

Commented by TokaNG at 2008/02/18 21:26
어리게 봐주면 좋은거 아닙니까?? ^^
많이 동안이신가 보네요~

리뷰 재밌게 읽다가 마지막에 풋~ 했습니다..^^;;
Commented by dcdc at 2008/02/19 00:04
느무느무 기대 만점인 작품입니다 :)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2/19 09:24
TokaNG 님 : 이제는 은근히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래도 저건 너무 ㅠ

dcdc 님 : 기대하셔도 후회는 안하실 거예요. ㅎㅎ
Commented by 총천연색 at 2008/02/19 14:38
신분증 검사란게 참... 헤헤. =ㅁ=

흠, 절대악이 선이 되는 과정이었나요?
볼만한 영화들이 참 많은 2008년입니다. 하아~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2/19 15:21
어떤 기사를 보니까 배우 김윤식씨 인터뷰에서 '절대로 엄중호는 '선'이 되어서는 안되는 캐릭터라 강약 조절에 힘들었다'고도 하시더군요. 보는 사람 나름이죠 뭐. '-'
Commented by 았아 at 2008/02/19 21:00
미괄식이군 ㅉㅉ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2/19 21:46
부럽냐?! ㅋㅋ
Commented by Run192Km at 2008/02/20 00:26
다들 재미있다고 하네요. 저도 기회되면..ㅎㅎ
민증 검사는 나이 많은 저도 당합니다..ㅎㅎ;;
Commented by 세라r at 2008/02/20 00:29
민증 검사는 좋은 겁니다 ㅋㅋ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2/20 11:37
Run192Km 님 : 영화 밸리에 올라오는게 온통 추격자 리뷰네요;;; 보셔도 후회는 안하실거예요~ ㅎㅎ

셰라r 님 : 그렇게 위안삼아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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