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레이서 (Speed Racer, 2008) - 너네가 블록버스터에 바라는게 뭔데?



 피곤해서 죽을 것 같지만 지금 써두지 않으면 영영 리뷰를 못쓰는 사태가 발생할 것 같기에 몇 글자 서툴게라도 적어보려 한다. 새벽 1시 심야로 보고 왔다. 다들 둘둘이 짝을 지어 왔는데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더라. 하지만 혼자 보아도 전혀 민망하지 않은 영화였다. 그리고 대낮에 보는 것보단 한밤중에 봐야 제맛인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볼게 아니면 볼 필요가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당신이 비의 빠순이가 아니라면.



 기대와는 다르게 평론가 집단에게 처절하게 두들겨 맞고 있는 모양새라서 조금 안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느꼈다. 영화에 대해 단선적으로 평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키치적인 감성으로 피갑칠을 한 느낌이다. 여기도 키치, 저기도 키치, 온 사방에 키치키치- 영화보고 느낌 점이 딱 세 가지 있다. 일단 하나, 눈아프다. 형형색색의 원색들이 눈을 아주 피로하게 만든다. 그리고 둘, 워쇼스키는 일본에 미쳐 있다. 일빠도 이런 일빠가 없다. 원작이 일본만화이니 뭐 어쩔 수가 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보고 나면 확실히 느낄 것이다. 이건 뭐 타란티노도 아니고 일본을 왜 이리 좋아해. 마지막 셋, 어쨌거나 영화는 끝내준다. 성경처럼 뻔한 스토리와 예언과도 같은 결말을 알고 극장에 앉아있음에도 눈이 홱홱 돌아가는 자동차 경주씬에서는 어쩜 그리 손바닥에 땀이 나던지. 다시 한 번 경고하겠는데, 극장에서 볼게 아니라면 그냥 영화보지마라. 하지만 보지 않고 넘어간다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근 1년 간 보았던 블록버스터 중에는 단연 최고였다. 트랜스포머보다 백 배 낫더라. 단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감상이니 개인차가 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 것.



 우리의 히어로 비군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비중이 높은 역할을 맡고 있다. 거의 주조연급이랄까. 반면 박준형씨는 후반 끝나기 20분 전쯤에 잠깐 나왔다가 끝무렵에 또 잠깐 나온다. 다 합쳐서 나오는 분량이 30초도 안된다. 지못미[..] 비군은 태조라는 캐릭터로 열연하였는데, 뭐 딱히 고도의 연기력이 요구되는 역할은 아니었다. 아니, 영화자체가 별로 그런걸 요구하는 것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초반에는 이유없이 씩씩대고 화를 내는게 저 아저씨 왜 저래.... 이런 느낌이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어색함이 덜하더라.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량이 많다는 점은 꽤 고무적이었다. 워쇼스키 형제의 다음 작품 닌자 어쎄신에도 캐스팅되었다고 하던데 앞으로 배우로서는 순탄한 길을 밟을 수 있을 듯. 이토록 단언할 수 있는 이유가 눈아프다 어지럽다 시끄럽다 난잡하다 지루하다 아무리 말이 많아도 이 영화 결국 흥행할게 너무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두고봐라. 트랜스포머가 그랬듯 교묘하게 블록버스터의 탈을 뒤집어쓴 진정한 가족영화이니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많이들 보러 온다. 이런 영화에 주연급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거다. 나는 원래 비의 팬이 아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자 그의 영특함에 당장이라도 팬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아직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건 닌자 어쎄신을 보고 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듯.



 스토리를 얘기하기엔 너무 민망해서 이 부분은 스킵하겠다. 개인적인 감상을 두서없이 나열해보자면 일단 너무 뻔하다는게 문제점이랄까. 가족애, 일에 대한 열정, 언제나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 뭐 여기까지는 봐줄만하다. 근데 거기에 자본주의 논리를 들이댄 점은 너무 심하지 않았음?! 한눈에 봐도 돈으로 떡칠해서 번쩍번쩍 광나는게 뻔히 보이는 영화가 '그래, 자본주의는 진실한 열정과 가족애를 이길 수 없어!' 이러고 있으니 요로콤조로콤 뜯어봐도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 그렇게라도 마무리짓지 않았으면 완전히 주제없는 영화가 되었을거라 한탄할 당신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그리고 그 막내동생이랑 침팬지, 걔네들 너무 자주 산만하게 툭툭 튀어나오더라. 완전히 맘먹고 가족영화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은데, 트랜스포머는 대놓고 그러진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많이 끼워넣었는데 문제는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는거. 극장에서 나 혼자만 웃고 있더라. 솔직히 웃기에는 조금 민망할 만큼 재미없는 유머들이었음. 그리고 집중해야 할 곳에서 빠른 편집으로 내용을 스킵해버리고, 늘어지지 말아야 할 곳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으니 솔직히 조금 산만하고 지루했다. 특히 맨 앞부분에서 과거와 현재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아 시간놀음으로 장난을 친거, 타란티노한테서 배워온건진 몰라도 잘못배웠더라. 산만하기만 하고 흡입력이 떨어져서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호흡조절을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영 시원찮았다. 그리고 문제의 마지막 그랑프리 대회, 그 앞에 벌어진 컨트리 랠리 경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대망의 하이라이트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별 재미없더라. 한 마디로 요약해서 원작을 너무 제멋대로 짜집기해놓은 불행한 결과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고 악센트를 주는데에 처절하게 실패했다. 정말 짜증나는건 그래도 재밌다는거다. 조율만 제대로 해놨으면 얼마나 더 재밌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짜증이 밀려온다. 



 하늘은 지나치게 파랗고 사람들은 빨강 노랑 파랑 색안경을 쓰고 여자들은 반짝이는 글리터링 드레스를 입으며 양복의 깃은 죄다 보라색이고 카메라 플래시는 핑크 혹은 스카이블루다. 나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었다. 귀를 막고 보아도 좋을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공존하는 부분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상당히 만화영화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마치 '300'이나 '씬 시티'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찰리와 초콜렛 공장'이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그리고 '내 차 봤냐'에 등장하는 보라색 뽁뽁이 유니폼과 "졸탄!"과 같은 키치 특유의 발칙함에 가깝다. 아니, 발칙함 그 자체다. 솔직히 보면서 넘치는 부담스러움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워쇼스키가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하랴. 이런 쪽으로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의외의 면을 엿본 것 같아 재밌기도 했고. '브이 포 벤데타'에서 살짝 실망하고 얼마전 개봉한 '인베이젼'에서 뭐 이런 허접쓰레기같은 각본을 썼어!!하고 분노하기도 했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더라. 아, 그러고보니 영화의 메세지는 '브이 포 벤데타'와 비슷하단 느낌이 들기도 하다. 미약한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뒤바꿀 수 있겠는가,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하지 않겠느냐, 시도한 것만으로 이미 세상은 바뀐다, 뭐 이런 류의.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히 별 감흥없었다. 난 영화를 보러 온거지 설교를 들으러 온게 아니었으니까.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긴 했는데, 나에게는 꽤 괜찮은 영화였다. 10점 만점에 딱 7점을 주고 싶은 영화. 훌륭하지 않은가! 블록버스터 가족영화에 점수까지 7점이다! 9점이나 10점이 아닌게 어딘가. 영화는 쉽고 단순하며 뻔하고 심지어 허술하기까지 하다. 머리를 비우고 즐기기엔 이보다 더 제격일 수 없다. 블록버스터에 너무 많은걸 기대하지 마라. 즐겁게 보고 나오면 그만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피로하게 만들 만큼 볼거리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영화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참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내일 심야로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비웃지 마라, 나는 트랜스포머도 극장에서만 세 번을 본 용자니까. 극장에서 해줄 때 몇 번이고 봐두고 싶은 그런 영화. 아마 나중에는 전혀 볼 일이 없어질 그런 영화. 뭐 어때, 나는 블록버스터에 많은걸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키치 특유의 정신도 꼭 그러하지 않은가. 보고, 즐기고, 아낌없이 사용하고, 미련없이 버려라. 내일 한 번만 더 보고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생각이다. 상관없지 않을까?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주는 편리함이란 대단히 가증스러운 것이니까.


by Beatrix | 2008/05/11 04:36 | Movi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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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egalo at 2008/05/11 09:08
미래 시대 머신인데... 너무 촌스러워요ㅠㅠ 어릴적 꿈이 사이버 포뮬러 라이더였는데
Commented by dcdc at 2008/05/11 10:48
기대하고 있습니다 +_+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5/11 12:26
megalo 님 : 그 촌스러움까지도 키치의 미학입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만든 것 같더군요;;;
마하 고고 등의 옛날 만화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과 그런 만화들을 못본 사람의 감상이 현저히 달라지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고도 하더군요. 저는 만화를 못봤으므로 패스[..] 하지만 어렴풋이 티비만화를 향한 향수를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만화영화에 가깝다니깐요;;; 어딜보나-

dcdc 님 : 보면서 내내 dcdc님 생각했습니다 ㅋㅋ 아~ 진짜 좋아하시겠다, 뭐 이런.
저 오늘 심야로 또 볼건데 이러다 진짜 세 번 보는거 아닌지 ㅠㅠㅠ
Commented by 총천연색 at 2008/05/11 12:34
키치함. Beatrix님이 보고 싫어할 거란 예상은 안 했네요. ㅎ-ㅎ
흠, 근데 요즘 제게 필요한 건
즐거움이 아니라서 극장 가서 볼 지는
의문이네요. ;ㅁ;
시사회 때 보고 왔어야 했는데. 흐으응.
Commented by Beatrix at 2008/05/11 12:40
총천연색 님 : 탐미적인 관점에서라도 한 번 볼 것을 추천합니다. 영화에서 오로지 메세지만 찾으려 들다간 피곤하고 고되지기 쉬우니까요. 적어도 눈이 사랑할 영화라는건 확실해 보입니다. 저는 의외로 영상미, 속되게 미장셴이라고 하는 것에 엄청난 의의를 두는 사람이라 굉장히 즐겁게 봤습니다만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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